
2020년 7월25일 한겨레는 ‘떠나야만 돌아올 수 있는 길’에 오르는 한 몽골인 미등록 이주청년과의 동행을 시작(토요판 커버스토리 ‘나는 지금 모르는 나라로 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했다. 1998년 엄마를 따라 한국에 온 6살 아이 ‘호이준’(가명)은 한국명 ‘호준’(가명)으로 살며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보호막이 돼주던 학생 신분(법무부 ‘재학생 강제퇴거 유예’ 지침)이 사라진 날부터 10년 동안 그(당시 28살)는 ‘존재해선 안 되는 존재’로서 자신을 숨기느라 “기진맥진”했다. 그의 언어와 식성과 사고방식과 인간관계는 모두 ‘한국 사람 호준’의 것이었으나 ‘내 나라’로 믿고 살았던 대한민국에서 그는 언제든 붙잡아 추방해야 하는 ‘불법체류 외국인 호이준’일 뿐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무력감으로 지쳐가던 그는 2020년 법무부 정책(기한 안에 출국하면 재입국 기회 부여)을 믿고 스스로 출입국·외국인청을 찾아가 자진출국을 신고(그해 6월16일)했다. 한국에서 살려면 호준을 버리고 호이준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자진출국이었지만 자진해서 출국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길에 나선 그의 첫발을 코로나 팬데믹이 가로막았다. 횟수 세는 걸 포기할 만큼 비행기표 취소가 거듭되면서 그의 불안과 초조도 짙어졌다. 한겨레는 취재기자의 갑작스러운 휴직으로 멈췄던 동행(연재)을 4년 만에 다시 잇는다.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아이들이 성인이 되자마자 맞닥뜨리는 현실은 얼마나 난폭한지, 그 현실을 건너려 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제도적 난관들이 가로막는지, 추방 위협에서 벗어나 안전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변수들이 제도를 비웃으며 돌출하는지, 그 변수들 앞에서 얼마나 많은 어린 꿈들이 무릎을 꺾고 좌절하는지, 정책의 입안과 집행은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해야 하는지를 그의 여정은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호준 한 사람의 시간을 따라가고 있지만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 2만여명(이주인권단체들 추정)의 ‘호준들’과 함께 걷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휴.”
호준이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복도로 들어서자 새벽 공항의 느슨하던 공기가 돌변했다. 아침 6시가 안 됐는데도 인천공항 법무부 출입국서비스센터 앞은 한창 북적였다. 출국확인서를 받으려는 사람들로 줄의 꼬리가 길어지고 있었다. 모두 오전 8시30분 비행기를 타려는 몽골인들이었다. 커다란 여행가방과 아직 부치지 못한 짐들이 그들 옆에서 함께 줄을 섰다.
1년을 기다려 간신히 잡은 몽골행 비행기였다. 그들의 얼굴이나, 호준의 얼굴에서도, 오래 기다린 여행의 설렘과 흥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 일행이 있었으나 호준은 혼자였다. 서로의 신고 서류를 봐주느라 웅성이는 사람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말이 없었다. 복도를 가득 채운 몽골어를 호준은 알아듣지 못했다. 23년 만에 가는 모국이었다. 그에게 모국은 ‘모르는 나라’였다.
2021년 7월15일 새벽 5시57분. 긴 줄 끄트머리에 호준이 섰다.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는 떨고 있었다.
어느 순간 몽골어를 잊어버린 몽골인이 됐지만 호준은 한때 4개 국어를 웅얼거리던 아이였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엄마가 오래전 해준 이야기를 호준은 기억했다.
“갑자기 일본말을 막 하는 거야. 영어로도 막 뭐라 뭐라 하고.”
어린 호준을 두고 공장에 출근해야 했던 엄마는 아들 손에 초코파이를 쥐여주고 현관문에 열쇠를 채웠다. 집 안에 갇혀 종일 혼자 지내야 했던 호준은 엄마가 틀어놓고 나간 텔레비전과 대화했다. 퇴근한 엄마가 문을 따고 들어오면 엄마 얼굴에 뽀뽀를 해대며 음운체계를 넘나드는 말들을 뱉었다. 각국의 만화 채널들에서 주워들은 표현들을 호준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따라 했다. 그때 호준은 “몽골에 있는지 한국에 있는지도 구분하지 못한 채” 그 작은 방에 있었다. 그 방이 호준의 나라이자, 세계이자, 우주였다. 몽골에서 태어난 것도, 한국으로 들어온 것도, 어느 하나 호준의 의지는 아니었으므로 국경은 단지 ‘어른들의 선’이었다. 아이는 몽골말을 잊었고 호이준을 자기 이름으로 여기지 않는 호준으로 자랐다.
“학교 졸업하고 뭐 하셨어요?”
2020년 6월16일 출입국·외국인청 직원이 ‘시기별 체류 행적’을 물었을 때 호준은 ‘불법의 시간을 고백하라’는 추궁 같아 주눅이 들었다.
“이삿짐도 나르고요.”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친구들이 수능 준비를 시작하면서부터 그 사실은 선명하게 각인됐다. 고등학생이라면 지옥일 수험 기간이 호준에겐 ‘가질 수 없는 지옥’이었다. 포기하는 것도 자격이 있을 때나 가능하므로 그에겐 시험을 포기할 자격마저 처음부터 없었다.
취업비자를 받게 해준다며 돈을 받고 엄마를 입국시킨 브로커는 1인당 소개비 50만원씩에 엄마와 일행들을 공장에 넘겼고, 브로커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엄마는 이미 ‘불법체류자’가 돼 있었으며, 존재하는 데도 자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를 나이에 호준은 ‘지은 죄 없는 범법자’가 됐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강제퇴거 유예’가 종료된 뒤론 언제 느닷없이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긴장 속에 살았다. 그의 모든 일상이 법의 눈 밖에 났다. 일하는 것도, 임금을 입금받는 것도, 휴대전화를 만드는 것이나, 이메일 주소를 갖는 것도 그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대학 생활을 이야기하고, 부모님이 사준 자동차를 자랑하고, 새로 시작한 연애 고민을 상담하고, 준비 중인 진로를 두고 정보를 주고받았다. “누군가 재수 생활의 괴로움을 토로했을 때 재수도 하지 못하는” 호준은 “나만 다른 세계에 고립돼 있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멀어졌다. 공장에서 임금을 깎이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면 “항의하는 대신 상대가 기분 상할까 눈치를 봤”다. “저 사람이 나를 신고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분노를 이겼다. 극도의 무력감으로 몸이 상하고 성격이 바뀌었다. “손이 떨리고, 뒷목이 땅기고, 눈이 충혈되는” 날들이 쌓일수록 “밝고 외향적”이던 그는 “말수 적고 내성적”인 사람으로 변해갔다.
2019년 12월 법무부가 “불법체류 외국인의 가파른 증가를 막을 새로운 제도”로서 ‘6개월 안에 스스로 나가면 범칙금과 입국금지 면제’를 제시했다. 법무부는 ‘신고(4만6128명) 기한이 끝나면 범정부 합동단속’을 예고하며 ‘단속될 경우 강제출국과 영구 입국금지’로 압박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해서 하고 싶거나 되고 싶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 호준에겐 성인이 된 뒤로 한번도 바뀌지 않은 ‘간절한 꿈’이 있었다. 그냥 평범한 사람.

13차례 취소 끝에
누군가에겐 거저 주어지는 평범을 얻기 위해 온 삶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법무부 정책을 따르는 것 외에 호준에겐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선택은 선택지가 있을 때 성립하는 단어였다. 호준은 시한을 보름 남겨두고 자진출국을 ‘선택 당했다’.
“2020년 7월15일.”
호준이 ‘출국명령서’를 받아 들었을 때 하얀 종이에 ‘출국기한’이 뽑을 수 없는 못처럼 박혀 있었다. 평생 피해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던 출입국·외국인청을 직접 찾아가 자진 신고했을 때만 해도 다신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한국에서의 시간이 닳아 없어질까 아까웠다. 호준은 그래도 서둘러 출국하길 바랐다. 나가야 돌아올 자격을 얻을 기회가 열린다면 하루라도 먼저 나가 한 시간이라도 먼저 돌아오고 싶었다.
“고객님의 7월14일 인천 출발 항공편이 운항 사정으로 취소되었습니다.”
출국 열흘 전 도착한 문자는 시작일 뿐이었다. 동일한 문장의 “스케줄 취소 안내”가 날짜만 바꿔 줄줄이 날아왔다. 7월18일, 8월1일, 9월2일, 10월10일, 11월30일…. 날짜는 해를 바꿔 2021년 1월로, 다시 2월로 넘어갔다. 3월부터는 다음 비행기표도 구해지지 않았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신고를 무를 수 없으니 예전처럼 미등록으로 지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국에서 살려면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모순 같았다. 그 모순을 받아들이려 용기를 짜내 떠날 준비를 마쳤으나 떠나려 해도 떠나지 못하는 현실은 더욱 갑갑한 모순이었다.
“국내 출생 아동으로 대상 한정.”
법무부가 밝힌 기준도 호준을 낙담시켰다. 2021년 4월19일 법무부는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 시행 방안’을 내놨다. 법무부의 발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2020년 5월6일)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미등록 이주 청소년 유미(가명·베트남)와 나나(가명·몽골)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낸 인권침해 진정(2019년 12월)을 인권위가 받아들였다. 법무부는 인권위 권고(“모든 절차를 활용해 체류자격 부여 여부를 심사”) 90일 안(2020년 8월14일)에 결론을 내야 했지만 입장 정리를 계속 미뤘다. 2020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미는 자진신고 기한 종료 한 달을 남겨두고 베트남으로 출국했다. 법무부 방안은 권고 348일 뒤에 나왔다. 국내에서 출생해 15년 이상 살아온 경우에 한해 고등학교 졸업 뒤 임시체류자격(G-1 비자)을 부여했다. 몽골에서 태어난 호준에겐 ‘구제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외국 출생자까지 포함시키면) 국내 법질서를 저해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였다.
“드디어 비행기 잡혔습니다.”
2021년 7월9일 호준이 메신저 단체대화방에 알렸다.
“와~.”
환호인지 걱정인지 모를 탄성들이 터졌다. 13차례 취소되고 14번째 잡힌 출국 일정이었다. 호준이 올린 비행기표에 찍힌 날짜는 7월15일이었다. 출국명령서가 지정한 첫 출국기한으로부터 1년이 꽉 찬 날이었다.
“호준이 나가기 전에 만나야죠.”
대화방에서 ‘긴급 환송회’ 날짜가 정해졌다.

“영영 도착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야, 끈다는 말도 없이.”
이틀 뒤 영아(아시아의창 이영아 소장)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무사히 다녀오라”며 긴 초 3개를 꽂고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호준이 바람을 ‘후’ 불어 초를 껐다. 보내는 사람들은 축하든 위로든 할 준비를 못 했는데 호준이 혼자 ‘의식’을 끝내 버렸다.
“소원은 빌었어요?”
사강(이주와 인권연구소 김사강 연구위원)이 묻자 그가 짧게 말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호준은 쌌다 풀었다를 반복해온 여행가방에 몽골 도착 뒤 시설격리 동안 사용할 생필품 위주로 넣었다. 몽골에서 신세 질 사람들에게 줄 선물도 가방 한쪽에 챙겼다.
“부탁해뒀으니까 필요할 때 연락해봐.”
영아가 몽골에 거주하는 한국인 수녀의 전화번호를 건넸다. 영아는 호준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성장을 지켜보며 한국 생활을 도와왔다. 호준이 자진출국을 신고할 때나 졸업증명서 떼는 날에도 옆에 있었다.
“어떻게든 돌아오게 할 거니까 마음 편히 먹어요.”
사강은 호준을 안심시켰다. 그는 호준에게 법무부 정책대로 출국할 것을 설득한 활동가였다. 이주정책 연구자이자 인권위의 미등록 이주아동 실태조사에도 참여했던 그는 정부 정책의 허점과 구멍을 잘 알고 있었다. 법무부의 장담대로 호준의 재입국이 순조로울지, 자신이 호준을 위험한 길로 등 떠민 것은 아닌지, 그도 호준만큼이나 불안했다. 서른살을 눈앞에 둔 호준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나이가 많을수록 법무부 구제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았다. 법무부 정책을 따르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이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 호준을 위해서 낫다고 판단했다.
“기분이 어때요?”
나흘 뒤 공항 가는 자동차에서 사강이 묻자 호준은 말했다.
“속은 더부룩한데, 괜찮아요.”
긴장으로 한숨도 못 잔 호준은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떡볶이를 만들어 먹었다. 떡볶이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약처럼 먹었더니 조금은 편안해졌다”고 했다. 떡볶이가 준 평안은 출국 절차를 밟는 동안 말끔히 사라졌다.
호준에게 공항은 긴장을 부르는 장소였다. 오래전 엄마 따라 한국에 들어오던 날의 기억이 흐리게 남아 있었다. 엄마는 비행기 삯을 아끼려고 몽골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베이징까지 이동한 뒤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길고 힘든 여정 내내 엄마를 놓치지 않으려고 긴장했던 감각이 공항에서 되살아났다. 그 호준이 어느새 어른이 돼 엄마 없이 혼자 몽골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아침 6시15분. 호준이 출입국센터에서 ‘자진출국 확인서’(정부 정책에 따른 출국임을 확인하는 증빙서류)를 발급받았다. 6시45분. 라면 넣을 자리가 없어 라면수프를 끼워 넣은 가방을 수하물로 부쳤다. 7시5분. 사강과 포옹했다. 7시8분.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사흘 전부터 코로나 거리두기 4단계가 시행되고 있었다. 1년 전 확진자 급증으로 출국이 막힌 호준이 마침내 한국을 떠난 날은 국내 신규 확진자 발생 역대 최다(7월14일 1615명)를 기록한 이튿날이었다.
공항에서 나와 영종도를 빠져나가던 사강은 몇 시간 전 섬으로 들어올 때 호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냥 다 포기하고 미등록으로 살 걸 그랬어요.”
호준은 떡볶이로도 괜찮지 않았다. 다시 밟을지 알 수 없는 한국 땅을 떠나며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렸다.
“공항에 영영 도착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이 길이 공항에 닿지 않고 계속되면 좋겠어요.”
사강이 호준뿐 아니라 자신의 불안까지 누르며 다독였다.
“뭘 포기해. 아직 아무것도 시작 안 했어.”

몽골에서 만난 변수들
엄마가 문 잠근 집 안에서 한국인지 몽골인지 몰랐던 어린 시절처럼 호준은 몽골에서도 문 잠긴 방에 격리돼 “몽골인지 한국인지 체감하지 못했”다.
울란바토르 공항에 도착한 그와 승객들은 인솔자를 따라 별도 통로로 이동해 버스에 태워졌다. 시설격리 호텔로 가는 동안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호준은 가슴에 담지 않았다. “이 ‘낯선 나라’에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할까” 하는 “걱정으로 호기심조차 일지 않았”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몽골 시절의 기억은 “목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어딘가로 가던 장면”이 전부였다. 호준에게 몽골에서의 시간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헤쳐 나가야 할 깊고 높은 눈처럼 보였다.
호텔은 입국자별로 방을 배정한 뒤 밖에서 문을 잠갔다. 호텔 밖은 물론 복도에도 나가지 못했다. 똑똑똑. 호준에게 말을 거는 것은 하루 세번 노크 소리뿐이었다. 식사를 방으로 들이자마자 곧바로 다시 문이 잠겼다. “하루 종일 코끝을 따라다니는데도 쉽게 적응되지 않는 몽골 음식의 향”이 그나마 몽골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호텔을 나온 뒤엔 할머니 집에 머물렀다. 격리는 풀렸지만 한동안 자가격리 하듯 지냈다. ‘생소한 것’이 ‘무서운 것’은 아니란 사실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익숙함’의 역할이 컸다. 집 근처에서 한국 편의점과 기업 상호가 드물지 않게 눈에 띄자 호준도 마음이 놓였다.
할머니는 엄마와 연락을 끊었으면서도 엄마의 가족을 찾아와야 했던 손자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이모와 삼촌이 몽골과 엄마의 지난 시간(사회주의 붕괴 뒤 각자도생에 내던져진 국민들)을 한국말로 띄엄띄엄 들려줬다. 할머니를 뺀 엄마 쪽 식구 모두가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이모의 아들은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돼 돌아왔다. 한때 엄마 때문에 ‘불법’이 됐다며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자신을 데리고 한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처지를 호준은 이해했다. 한 사람이 다른 나라까지 일하러 가는 데는 ‘가난’이란 말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길고 긴 이야기가 쌓여 있었다.
6살 이후 본 적 없는 아빠도 만났다. 엄마와 이혼한 뒤 새 가정을 꾸린 아빠는 엄마가 다른 여동생을 데리고 호준을 보러 왔다. 코로나 백신 접종비와 생활비도 보탰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호준의 몽골 생활을 도왔지만 호준은 한국이 그리웠다. 한국말, 한국 날씨, 한국 드라마, 그를 지지해준 사람들까지. 그는 “한국의 모든 것이 사무쳤”다. 그리움이 커지면 이모들이 한국 음식을 만들어줬다. 닭볶음탕과 김치찌개. 한국과 몽골이 뒤섞인 그 야릇한 음식들을 먹고 있으면 호준은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은 안심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떡볶이.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땅의 맛. 호준은 빨개지다 만 떡을 삼키며 울컥했다.

“한국대사관엔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호준이 2021년 9월 대화방에 근황을 알렸다. 그는 한국의 사강과 상의하며 재입국을 준비했으나 행정 처리 시스템 자체가 다른 몽골에서 혼자 헤쳐가기엔 난관투성이였다. 정책이 보도자료를 벗어나 실행 단계로 가는 순간부터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 온갖 변수들이 튀어나왔다. 법무부가 자진출국자들에게 심사를 거쳐 부여하는 재입국 체류 기간은 고작 90일 단기비자(C-3)였다. 그동안 위법 없이 지내다 나가야만 두번째 입국 때 90일짜리 복수비자(유효기간 1년)를 줬다.
처음 자진출국을 고민했을 때 호준은 한국에서 1년 이상 머물려면 고용허가제(E-9, 최대 4년10개월)를 통해 이주노동자로 돌아오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감염병 재난은 그 ‘최선’도 빼앗아갔다. 호준의 출국이 막혀 있는 동안 외국에서 고용허가를 받은 노동자